[논단] 국가 에너지전략, 수급 조절 유연성과 적응성 필요
지난 30년간 우리나라의 에너지정책은 경제성장에 필요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에서 출발해 에너지효율 향상, 기후변화 대응과 온실가스 감축, 재생에너지 확대 및 탄소중립으로 그 중심이 이동해 왔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가격과 공급망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미·중 기술경쟁과 핵심광물 확보 경쟁이 심화되면서 에너지정책이 산업정책을 넘어 국가안보의 핵심 영역으로 변화하고 있다. 동시에 기후변화에 따른 극한기상과 재생에너지 확대, 전기차와 데이터센터 등 새로운 전력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에너지안보의 범위가 석유와 가스 등 연료의 안정적 확보에서 전력망, 핵심광물, 기후, 사이버 위험 및 전력시스템의 유연성까지 확대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주변 국가와 전력망이 연결되지 않은 독립계통으로, 발전설비의 확보뿐 아니라 전력망과 저장설비를 활용한 자체적인 수급조절 능력이 중요하다. 원전과 변동성 재생에너지의 확대, 석탄발전의 단계적 폐지가 동시에 추진되는 상황에서는 전력계통의 안정성과 유연성 확보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 저장, 변환하고 수송할 수 있는 국가 인프라 설계가 매우 시급하다.
이를 위해서는 에너지 안보와 탈탄소화를 하나의 국가전략으로 통합해야 한다. 또한 국제 에너지 시장과 기술 발전, 전력수요 및 기후변화를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운 만큼 다양한 기술을 조합하는 포트폴리오형 에너지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특히 비중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전기에너지의 경우에는 다양한 발전원을 국가 에너지 체계의 특성에 맞게 활용하되, 전력수요와 계통 상황에 따라 조정할 수 있는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에너지 저장은 발전설비와 전력망, 수요를 연결하는 핵심 인프라 또는 플랫폼으로 활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과거 피크 수요 대응이나 재생에너지 출력 보완을 위한 보조 설비로 인식됐다면, 앞으로는 재생에너지의 시간적 변동성을 조정하고 계통 안정성을 확보하며 전력망의 활용도를 높이는 핵심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
IEA 역시 전력망 건설의 경우 재생에너지나 데이터센터보다 훨씬 긴 시간이 소요되므로, 저장과 수요반응 등 전력 시스템의 유연성을 활용해 기존 전력망의 활용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장주기 저장은 단순한 왕복 효율만으로 경제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재생에너지 출력제어 감소, 송배전망 투자 지연, 지역계통 안정화, 피크수요 대응, 예비력 및 보조 서비스 제공 등 전력시스템 전체의 편익을 평가에 반영해야 한다. 그리고 저장설비의 확산을 위해서는 전력의 시간 이동, 주파수·전압 조정, 예비력, 혼잡 완화 및 재생에너지 수용 등의 서비스에 대해 합리적인 보상이 이뤄지도록 시장제도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 이를 통해 저장사업의 경제성을 확보하고, 민간투자와 국내 산업의 성장을 유도할 수 있다.
향후 30년의 에너지 환경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정부가 집중해야 할 것은 국가 에너지에 대한 대전제를 유지하되 변화에 따라 수정하고 전환할 수 있는 정책적 선택권과 기술적 유연성 확보다. 이를 위해 첫째, 에너지 안보, 탄소중립, 경제성, 산업경쟁력과 지역 수용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국가 에너지정책 평가체계의 구축이다. 둘째, 에너지원과 발전원뿐 아니라 전력망, 에너지 저장, 수송, 수요관리 등 시스템 유연성에 대한 연구개발 및 실증설비 투자의 확대다. 셋째, 에너지저장 기술개발을 배터리 중심에서 장주기·장시간·다중에너지 저장으로 확대하고, 압축기, 터빈, 열교환기, 전력변환장치, 전력반도체 등 국내 산업기반과 연계해야 한다.
에너지 안보와 탄소중립은 공급망, 에너지 저장, 수급 관리 및 다양한 저탄소 전원을 통합해 함께 달성해야 할 국가적 목표이다. 따라서 국제적 환경 변화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더라도 정책을 수정하고 기술을 전환하며 새로운 에너지원을 수용할 수 있는 정책의 적응성, 에너지 시스템의 유연성, 산업의 기술경쟁력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우리나라 에너지 안보와 탄소중립의 실질적인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 /염충섭 KAIST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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