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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공지] [논단] 선진국 벤치마킹, 이제는 질문을 바꿔 보자
관리자
2026-09-09 92
[논단] 선진국 벤치마킹, 이제는 질문을 바꿔 보자

오랫동안 개발도상국으로서, 추격자로서, 모방자로서 한국은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을 벤치마킹해 왔다. 지난 수십년간 질문은 이런 식이었다. “선진국 건설산업은 왜 강한가?”, “선진국 입찰제도 중 우리가 도입할 만한 제도는?”, “선진국 건설산업의 핵심 경쟁력은?”, “선진국의 건설기술 트렌드는?”… 이제는 질문을 바꿔 보자. “선진국 건설산업은 왜 이렇게 약해졌는가?”

지금 미국은 한국에 단순 투자만 요청하지 않는다. 반도체 공장이건 자동차 배터리 공장이건 한국업체들이 직접 미국에 와서 건설해 주기를 바란다. 영국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건설할 수 없는 나라가 됐다고 한탄하고 있다. 한동안 유럽경제의 기관차 역할을 했던 독일의 건설산업도 신통치 않다. 한국의 벤치마킹이 됐던 미국과 유럽 선진국의 건설산업이 왜 이렇게 됐을까? 그 원인을 제대로 알고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한국 건설산업의 쇠퇴를 막고 발전을 도모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본다.

미국과 유럽 선진국의 건설산업 쇠퇴는 지난 수십년간에 누적된 구조적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몇 가지 핵심적인 공통요인부터 추려 보자.

첫째는 인구구조의 변화와 심각한 숙련공 부족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더불어 숙련기능공과 기술인력들이 대거 현장을 떠난 반면, 청년층 유입은 저조해 신규 인력 공급이 매우 부족했다. 게다가 미국과 유럽 각국마다 몇 년 전부터 강력한 이민자 규제를 시행하면서 외부로부터의 신규 노동력 공급도 줄어들었고, 그 결과 인건비 상승과 공기 지연이 일상화됐다. 특히 영국은 이른바 브렉시트 이후 동유럽 출신의 숙련 기능공(목수, 벽돌공, 용접공, 용접기사 등)들이 대거 유출되면서 신규 외국인 충원이 사실상 차단됐다. 이에 따라 현장 인건비 상승과 공기 지연 및 품질 저하 문제가 심각해졌다. 독일도 비슷한 처지다.


둘째는 과도한 토지 및 건축 규제와 인허가 지연이다. 토지 사용 제한, 고도 제한, 인허가 절차의 복잡화로 인해 특히 대규모 프로젝트일수록 승인 가능성이 낮아졌다. 미국은 주?지자체별로 건축 법규와 현장 규제가 제각각이다 보니 시공 프로세스를 표준화하기 어렵고, 현장마다 감리 및 승인 절차에 막대한 시간이 소요되며, 일부 지역에서는 노동조합의 엄격한 작업 범위 제한 및 계약 조건으로 인해 현장 작업의 유연성도 떨어졌다. 영국은 엄격한 토지 이용 및 계획 승인 절차로 인해 대규모 주택이나 인프라 프로젝트의 기획부터 착공과 준공에 엄청난 시간이 소요된다. 독일도 복잡한 에너지·환경 규제로 인해 설계 및 시공 단가가 상승했고, 복잡한 인허가 및 관료주의적 승인 절차로 인해 사업기획부터 착공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있다.

셋째는 소규모 영세업체 중심의 건설산업 구조와 혁신의 모멘텀 부재다. 미국 건설시장은 파편화된 영세 시공업체 위주로 구성돼 있다. 물론 벡텔을 비롯해 일부 극소수 글로벌 대기업이 있긴 하지만, 미국의 대형 및 중견건설사 대부분은 사실상 미국 본토 중심의 내수기업들이다. 대다수 미국 영세 건설업체들은 R&D, 최신 시공 장비, 디지털 기술(BIM, 현장 관리 소프트웨어 등)에 투자할 여력도 별로 없다. 영국 건설시장은 약 90% 이상이 10인 미만의 소규모 영세업체로 구성돼 있다. 영국의 대형 종합건설사는 직접 시공을 하지 않고 프로젝트 관리에 집중하며, 실제 현장 작업은 수많은 영세 하도급업체들이 다단계 하도급 구조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

결국 미국과 유럽의 건설산업은 공통적으로 인구구조의 변화와 숙련공 부족, 강도 높은 규제, 소규모 영세업체 중심의 산업구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쇠퇴했다고 볼 수 있다. 오랫동안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미국과 영국의 건설산업은 이제 반면교사 역할을 해 주고 있다. 건설시장에 지속적으로 유능한 젊은 인재를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갈수록 건설규제를 강화해 간다면, 내수중심의 소규모 영세업체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파편화돼 간다면, 한국 건설산업도 머지않아 미국이나 영국의 건설산업처럼 쇠퇴할 가능성이 높다.

불행하게도 한국도 50대 후반에서 60대 숙련 건설인력의 퇴장을 눈앞에 두고 있다. 노동과 안전 및 환경규제는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건설업계 내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국내 건설시장도 소규모 영세업체들이 주류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과 유럽의 건설산업 현황은 한국 건설산업의 미래가 될 소지가 크다. 만약 그들이 처한 길을 회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미국과 유럽 건설산업이 쇠퇴한 원인은 자본과 기술 부족 때문이 아니다. 인력, 규제, 시장 구조 등이 더 근본적이고 큰 원인이다. 산업정책적인 관점에서 미국과 유럽의 건설산업이 왜 약화됐는지를 심층분석해서 우리만의 새로운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상호 유창E&C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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